시간, 달력을 썰다
2009. 1. 5. 09:06ㆍ글귀들
젊은 남자가 큰 얼음 한덩이를 손으로 밀고 간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얼음은 차차 녹는다
이젠 발로 찬다
얼음이 탁구공처럼 작아지자 발로 가볍게 툭툭 건드리며 간다
.......
.......
.......
날카로운 시간의 칼날에 자신의 살을
한점 한점 떼어주던 달력이
단말마(斷末魔)의 비명을 지른다...
"나는 더이상 떼어줄 살이 없어요 ..."
임종(臨終)을 앞둔 12월의 비명소리에
재활용 상자 안에서 지난 신문들과 함께 단잠을 자던
9월과 10월이 고개를 든다
칼날에 베인상처가 다 아물기도 전에 11월은
그들의 따뜻한 이불이되어 잠이든다
... 먼지가 상처를 치료한다
시간의 무게만큼 많은 폐지들의 무게에
압사되었던 1월이 용캐 살아나 누렇게 변한 얼굴로 외친다
"나 많이 늙었죠..."
.......
달력이 시간의 칼날에 자신의 살점을 내어줄때
나는 그들을 대신해서 피를 흘렸다
한점 한점 베어졌던 살들이
나의 페르소나(persona)가 되어
그들과 함께 잠을 자고
그들과 함께 이불이 되고
그들과 함께 늙어버렸고
그들과 함께 임종을 기다린다
.......
.......
얼음을 밀던 남자는
몇 해전 여름, 서울의 한 아트센터에서 열렸던
멕시코 미술중의 한 작품이다
작가(프란시스 알리스)는 멕시코시티에서
8시간 이상 얼음을 밀고 다닌행위를
5분 가량의 비디오로 기록했다
얼음을 밀고 다니는 것이
쉬지 않고 무엇인가 "하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얼음이 다 녹아서 "아무것도 아닌 것" 이 되어 버렸다
살들을 내어주고 피를 흘리고 먼지가 상처를 치료하고 ...
분명 고통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
지금은 다 녹은 얼음처럼 아무것도 남은게 없다
그 큰 얼음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
데이비드 카퍼필드와 차를 마셔본 적이 없으니
지금은 나로서도 알길이 없다
.......
.......
12월의 비명은 결국 당위성이다
어쩌면 베어진 살들의 당위성을 찾기위해
또 다른 상위의 얼음을 굴리고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길바닥에 떨어진 2005년의 거죽을 등짝에 깁어입고
형형색색의 페르소나를 모자처럼 눌러쓴다 ...
개날, 소날, 뱀날 등 ... 십이지(十二支)가 표시된
새 달력을 여권처럼 원하시던 어머니에게
2006년을 항해 하려면 여권뿐만이 아니라
지도도 필요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폐부 깊숙히 숨겨놓았던 담배연기를 쏟아내며
구겨진 나의 뇌를 활짝펼처
한 눈에 볼수 있는 선명한 지도를 만든다.
...
"그래 현재 내 위치는 여기군...!"
- 양귀비 꽃
http://blog.empas.com/bnc0369/11558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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